Last Flower

고백을 봤다. 
그라비아 아이돌에 익숙해서 인지 교복을 입은 일본 소녀들 때문에 흡족했다.
눈 뿐만 아니라 귀 역시 보리수(boris) 덕에 매우 좋았다.
라디오헤드의 "Last Flower till Hospital" 도 나온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편집된 영상 역시 과연 나카시마 테츠야의 영화 다웠다.
<고백>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비극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희망적인 상황이 조성될듯 하다가 한 순간에 무참하게 부셔 버리길 반복한다.
각자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관객에게 커다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지만, 극 중 인물들에게 있어서 고백은 독백일 뿐이다.
톰 요크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퍼질 쯤 눈시울이 불거졌다.
 "Last Flower"의 가사는 이 영화가 주는 함의 그 자체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커플에게 음료수라도 줄 걸 그랬다. 

by Mineral Youth | 2011/04/03 20:35 | | 트랙백 | 덧글(0)

몽상주의자

1.
 이발소를 하시는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온갖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매일 저녁 아버지는 염색약이 묻은 신문 뭉치를 한아름 들고 돌아오셨다.
삼류찌라시기사를 남발하는 연예신문부터 경제지까지 말이다.
비록 아침 일찍 배달된 신문의 첫페이지를 넘기는 희열은 이발소가 쉬는 날에만 만끽할 수 있었지만.
때론 어떤 사람의 코딱지가 달라붙어 있기도 했고 점심으로 드셨을 법한 짬봉 국물이 묻어있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조간을 석간으로 읽었다. 
당시 나에게 신문(新聞)은 이미 구문(舊聞)이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집필하는 도중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조간 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기도다."

아마도 내가 가장 현실적이었던 시절은 아침에 발간된 신문의 운수란을 통해 당일의 운수를 점검하던 시절일 거다.

2.
 5년간 구독한 신문을 끊었다. 해당 신문에 대한 실망 때문은 아니다.
6개월 전부터 신문은 우편함에서 폐지수거함으로 직행했다.
가끔 튀김을 할 때 덮개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니면 날파리를 잡거나, 꼬깃꼬깃 구겨서 신발 속에 넣거나
어쨌든 신문 지면에서 읽은 글자는 0000년 00월 00일 뿐이었다. 
OO신문사를 위한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더 이상 신문을 구독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보는 창이니 뭐니 해서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장기간 구독한 신문이라서 뭔가 허전할 줄 알았다.
하지만 후라이팬 뚜껑 대용 신문지는 방 한 구석에 수북히 쌓여있다. 
아쉬울 게 없었다.

3. 
 신문대신 리모컨을 들었다. 
채널을 돌리다 경제방송에서 멈췄다.
신문으로 읽은 주식이라는 꼭지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현실주의에 대한 복음은 신문이라는 경전에 주석을 달기 시작했다.

"일본 원전 피해로 우리나라 건설주가 얻은 반사이익은 ......"
"요오드제 수요증가로 제약주가......"
"리비아 사태로 현지에 진출한 건설주의 주가는......"

이런 식이다. 
헤겔은 말은 틀림이 없었다. 
나는 현실감각제로의 몽상주의자가 됐다.

by Mineral Youth | 2011/04/03 20:14 | 트랙백 | 덧글(0)

일본의 재난을 바라보는 두 시선

일본이란 나라에게 지진이나 해일은 생소하지 않다. 
오히려 자연재난을 사회적재난으로 환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엔 재일조선인들이 재난의 원흉으로 지목됐고,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 당시엔 재일동남아시아인들이 지목됐다.
재난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거대한 희극(喜劇)으로 각색된다. 
혹자는 재난에 대처하지 못한 일본정부를 국민들이 불신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네이션/스테이트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오히려 시대의 비극이 네셔널리즘을 강화해 고립된 개인을 국가와 직접 연결시킬 것이라 말한다.(http://www.nytimes.com/2011/03/17/opinion/17azuma.html)
국가이데올로기를 걸러내는 필터로서 지역 공동체가 부각되어야 한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으나 
'원전'이라는 생각밖의 특수한 상황이 개입하면 이 마저 힘들어 보인다. 
죽음을 불사한 원자로 '결사대'가 개인들의 감정을 연결하고 그들은 국가의 환영으로 재림한다. 
이런 감정의 연결고리가 견고해 질 경우, 비극의 결말에 어떤 터닝포인트가 오더라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일련의 드라마는 원자력사고를 정상사고(Normal Accident)의 범주에서 끌어내릴 게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가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보내는 한편, 모든 정상적인 것(감정적이든, 절차적이든)들에게 반론을 제기해야 하는 이유이다.
   

by Mineral Youth | 2011/03/17 16:25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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